曺永模
1924-04-13 ~ 1951-12-11·현대
이명·자·호 曺台植, 曺泰植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조영모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경산(慶山) 사람이다. 1944년 7월 경북 경산군에서 일본 징병제도에 대해 결사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전력을 더욱 강화·보충하기 위하여 1943년 7월 '해군특별지원령'을 공포하였다. 또 '학도지원병' 제도를 두어 학생들을 강제동원시켰다. 그런데 일제는 전쟁상황에 더욱 불리해지자, 1944년 4월에는 징병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때 경북 경산군에 사는 조영모를 비롯한 안창률(安昌律)·김명돌(金命乭) 등 29명은 1944년 7월 징병을 반대하기로 결의하고 대왕산(大王山)에 본부를 차렸다. 그들은 일경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이곳에 모여야 했기 때문에, 충분한 식량을 준비하지 못하고, 단지 일경과 맞서 싸울 도끼와 낫, 쇠창 29개를 대장간에서 만들어가지고 올라왔을 뿐이었다. 우선 그들은 일경과 맞서기 위해 소대편성을 하였다. 총대장으로 안창률과 김명돌을 선출하고 나머지 대원들을 둘로 나눴다. 그리고 그들은 돌로 막사를 짓고 솔잎으로 위장하였으며, 교대로 보초를 섰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곧 일경에 알려졌다. 일경들은 그들을 포위하고 처음에는 투항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총을 쏘아댔다. 그들은 산정상에서 돌을 굴리며 저항을 계속하였다. 장기전으로 인해 식량이 떨어지자 일부 특공대원들이 8월 6일 대왕산에서 재집결하기로 하고 하산하였으나, 일경의 정보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44년 10월 4일 구류되었으나 1945년 8월 17일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8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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