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正來
1914-08-16 ~ 1935-05-24·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全在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조정래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조정래는 1931년 2월 27일 경남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동맹휴교를 주동하여 퇴학되었고, 같은 해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전기학교에 입학, 일본반제동맹 동경지방위원회 전기학교반(電氣學校班)의 일원이 되어 기관지 『반제신문』의 배포 등을 맡았다. 같은 해 12월, 일본적색구원회(日本赤色救援會) 동경지방위원회 성서지구(城西地區) 산하 고원사(高圓寺) 가두반(街頭班)에 가맹하여 활동하다가 병으로 12월 말경 서울로 돌아왔다. 1932년 초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에서 활동했으며, 8월 이후 서울에서 조국의 독립과 신사회 실현을 목적으로 조선반제동맹·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오르그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8월 26일과 10월 15일경에 이재중(李在中)·화전헌인(和田獻仁)·이긍우(李亘雨)와 함께 ‘조선반제동맹’ 결성을 위해 협의하였다. 이때 공장 노동자에게 반제국주의·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공장 내에 독서회를 두기로 하였다. 또한 학생운동과의 연대를 도모하면서, 화전헌인·이재중은 공장방면, 이순근(李舜根)은 학생방면, 자신은 공장·학생 양 방면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11월 초 동덕여자고등학교의 독서회를 맡고 있던 이관술(李觀述)과 만나 함께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수업료의 감면, 학내 경찰권 투입반대 등의 행동강령에 기반한 연구회를 조직하고 학생을 지도하였다. 11월경, 동지들과의 협의 하에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준비위원회의 대표로 12월 중순 동경에서 개최되는 태평양연안국 반제국주의민족대표자대회(反帝國主義民族代表者大會)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동지들과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회의에 지참할 슬로건을 논의한 끝에 ‘타도 일본제국주의, 조선어 본위의 교육실시, 식민지 노예교육반대, 국유임야의 민중공유, 조선절대독립’ 등으로 결정하였다. 조정래는 슬로건을 지참하고 회의에 참가했다가, 1933년 1월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검거되었다. 이후 국내로 호송되어 동대문경찰서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취조와 심문을 받았고, 1933년 3월 22일 기소되어 1934년 3월 31일까지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을 거쳤다. 같은 해 12월 20일 제1심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미결구류 350일 통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5년 5월 20일경 보석되었다가 5월 24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8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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