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昌燮
1912-10-18 ~ 1969-03-18·현대
이명·자·호 良川昌燮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조창섭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全羅南道) 광주부(光州府)에서 학생들의 시위운동으로 한국인 학생 수십 명이 검거되자, 19일 목포상업학교에서는 한국인 학생 전원을 규합하여 선전 격문을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감행하며 학교당국에 진정서(陳情書)를 제출하여 동맹휴교(同盟休校)를 결행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인형(李麟炯)이 작성한 초안에 따라 선전 격문과 진정서 원고가 작성되었다. 조창섭은 20일 이광우(李光雨)로부터 이러한 협의 결과를 전해 듣고 적극적으로 이에 찬성하고 가담하였다. 당일 오후 이광우·정찬규(鄭燦圭)·오상록(吳上錄)·박사배(朴仕培) 등과 주도하여 동교생(同校生) 다수를 송도공원(松島公園)에 모아 집회를 개최하고 시위운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창섭은 정찬규로부터 선전 격문을 건네받아 이를 배포하는 역할을 맡고, 앵정(櫻町) 부근에 격문을 배포하였다. 이날 동교 학생들은 학교의 전화선을 끊고 격문을 배포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시위 당일 동료 학생 40여 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2월 5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검사국(木浦檢事局)으로 송치되어 취조를 받고, 28일 동료 학생 19명과 함께 예심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24일 예심이 종결되어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출판법 위반’으로 공판에 회부되었다. 3월 2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즉시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7월 1일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29일 ‘미성년(未成年) 상고(上告) 취하’에 따라 형이 확정되었다. 1934년 칙령(勅令) 제19호에 따라 징역 3월 12일로 변경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18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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