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泰璸
미상 ~ (1923)·조선
이명·자·호 趙泰鎭, 趙泰濱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조태빈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황해도 평산(平山) 사람이다. 조태빈은 김명봉(金鳴鳳)과 함께 황해도 의병장 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 등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3·1운동 이후에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가 활동한 이 단체는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의병장들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역량을 기르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 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가 개최되고 그 결과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여기에도 참여하였다. 당시 그와 함께 활동했던 주요 인물로는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相悳), 비서과장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응해(李雄海), 검무부장 최명수(崔明洙), 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사판소장 이영식(李永植),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식산국장 박득산(朴得山), 권업부장 강제하(康濟河),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교통국장 황동호(黃東浩),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을 들 수 있다. 조태빈이 활동한 대한통의부 의용군은 이 때 대대, 중대로 편성되었는데, 간부 명단을 보면 제1대대장 강남도(姜南道),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1소대장 김보국(金保國), 제2소대장 전봉도(全奉道), 제3소대장 김기준(金基準),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1소대장 김전(金田), 제2소대장 이규성(李奎星), 제3소대장 신태봉(申泰鳳), 제3중대장 최시흥(崔時興), 제4중대장 홍기주(洪基柱), 제1소대장 장세룡(張世龍), 제2소대장 김국보(金國輔), 제3소대장 신홍영(申洪永) 등이었다. 한편 1923년 대한통의부와 갈등관계를 갖고 있던 통의부내의 전덕원 등이 중심이 되어 환인현(桓仁縣) 대황구(大荒溝)에서 의군부(義軍府)가 조직되자, 조태빈은 김명봉과 함께 중립을 유지하며 통의부 제5중대장 김명봉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이 때 당시 5중대는 흥경현(興京縣)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였는데 중대장 김명봉, 서기 오두영(吳斗泳), 제1소대장 김창천(金昌天), 제2소대장 김광추(金光秋), 제3소대장 김일(金一), 예비소대장 김구(金俱) 등이었으며, 무장군인은 120명이었고, 관할 구역은 무순(撫順)·본계(本溪)·흥경·개원(開原)·봉천(奉天)·동풍(東豊)·길림(吉林)·장춘(長春) 등지였다. 1923년 조태빈은 참의부(參議府)의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1923년경 통의부의 습격을 받아 김명봉과 함께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