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化善
1892-07-13 ~ 미상·일제강점기
이명·자·호 趙景福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조화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황해도 평산(平山) 사람이다. 1920년 2월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22년 8월 30일 남만주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통군부(統軍府) 대표 등 71명이 참석하여 결성한 것으로, 함께 대한통의부에서 활동한 인물로는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相悳), 비서과장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응해(李雄海), 검무부장 최명수(崔明洙),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사판소장 이영식(李永植),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식산국장 박득산(朴得山), 권업부장 강제하(康濟河),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교통국장 황동호(黃東浩),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을 들 수 있다. 대한통의부에서 활동하던 조화선은 1923년 대한통의부가 이념상의 갈등으로 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며, 최석순(崔碩淳) 등과 함께 참의부(參議府)를 조직하고 이에 참여, 활동하였다. 그가 활동한 참의부는 통의부 의용군내 제1·2·3·5중대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한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는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참의부는 중앙의회를 가지고 군사와 민정을 아울러 통괄하는 단체였으며, 창설 당시의 주요 부서와 주요 간부는 다음과 같다. 참의장 겸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 김창대(金蒼大), 훈련대장 박응백(朴應伯) 등이다. 한편 조화선은 1924년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여기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가입하여 활동하던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되자 곧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아울러 중앙행정위원으로 이탁·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김이대(金履大)·윤덕보(尹德甫)·김용대(金容大)·이진산(李震山)·김형식(金衡植)·이청천(李靑天) 등을 선임하여 조직을 완료하였다. 또한 정의부를 끌고 나갈 분과위원도 선임하였는데, 자치분과위원 이진산·맹철호(孟喆鎬)·최명수(崔明洙), 군사분과위원 이장녕(李章寧)·조성환(曺成煥)·김철(金鐵), 교육분과위원 이창범(李昌範)·고활신·김동삼, 재정분과위원 김호(金虎)·윤덕보·승진(承震), 생계분과위원 박정조(朴正祚)·김정제(金定濟)·백남준(白南俊) 등이었다. 아울러 부령(府令)으로 명칭공포식, 창립기념일, 기원연호(紀元年號), 공농제도(公農制度), 행정위원회 규칙, 칭호법, 기관보 및 교과서 발간, 행정위원회 결의사항 등을 공포하였다. 조화선이 활동한 정의부는 중앙본부를 처음에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두고 참의부(參議府)의 세력권인 관전현(寬甸縣)·집안현(輯安縣)·환인현(桓仁縣)·통화현(通化縣) 등 4개 현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 10개의 지방총관소(地方總管所)를 설치하였다. 정의부는 이후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서 화전(樺甸), 길림의 신안둔(新安屯), 반석(盤石) 등으로 옮기면서 1926년 말경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奉天省)에 살고 있는 한인 1만 7천여 호, 8만 7천 명을 관할하였다. 정의부는 중앙행정위원회에 군사부를 두고 사령간 아래 중대와 소대를 두었다. 이들 군사부는 일본육사출신의 이청천 또는 대한제국 군대 출신의 김창환(金昌煥), 그리고 오동진 등의 지휘를 받았으며, 정이형(鄭伊衡)·문학빈(文學彬)·양세봉(梁世奉) 등 평안도 출신들이 주로 중대장과 소대장의 직책을 맡았다. 조화선도 참여한 정의부의 군사활동은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집활동, 독립선전공작, 주구 암살, 일본 관리의 사살, 적기관 방화공작 등이었다. 한편 정의부는 부내의 모든 장정에 대하여 의무병제를 실시하였으며, 상비군으로서는 8개 중대와 민경대(民警隊)를 두었고, 1927년에는 700명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모젤과 뿌로닝 권총 그리고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농촌에는 군사보급회를 설립하여 모든 장정과 재향군인들에게도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정의부에서 조화선은 1926년 11월 길림성(吉林省) 반석현(盤石縣)에서 중앙의회(中央議會)를 개최하고, 간부를 개선할 때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발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조화선은 1930년대에는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서 주로 반만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가 활동한 조선혁명군은 1929년 12월 20일 결성되었으며, 조선혁명당의 군대이다. 이 조선혁명군은 선언서에서 "국민부로부터 엄연히 분립하여 혁명운동에 대한 군사적 역할을 전적인 임무로 한다"고 발표하였다. 아울러 조선혁명군은 독립하여 혁명사업에 종사하고 무기는 혁명군인만이 휴대케 한다. 혁명군이 지도기관으로 각 대에서 대표자를 뽑아 군사위원으로서 군사위원회를 조직케 하는데 위원 수는 14명으로 한다. 군사위원회에서는 책임자 3명을 선출한다. 그리고 그 명칭을 혁명군 총사령에 이진탁(李辰卓), 부사령에 양세봉(梁世奉), 참모장에 이웅(李雄)이 임명되고 종전에 10개 부대로 편성되었던 각 지방군은 7개대로 개편되었다. 1932년 3월 조화선은 중대장으로서 총사령관 양세봉, 참모 김학규(金學奎) 등과 함께 중국의용군 왕조헌(王彫軒), 양석복(楊錫福) 등과 합세하여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旺淸問)에서 무순(撫順) 방향으로 이동 중 관동군(關東軍)과 교전하였다. 조화선은 1932년 8월경에는 조선혁명군 제2사단장으로서 당 군사부 책임자인 문빈(文彬), 총사령관 양세봉, 참모장 김학규 등과 활발히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선혁명군 제4차 간부회의에서 제3사 사령으로 선임되었다. 1933년 7월 7일에는 영릉가(永陵街) 석인구(石人溝) 전투와 통화현(通化縣) 쾌대모자(快大帽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37년 2월에는 국내로 진격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5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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