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培熺
1890-01-08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주배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3월 15일경 함경남도 함흥군에서 최순택(崔淳鐸) 등이 비밀리에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에 관한 독립신문’이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출판했다. 주배희는 이를 함흥 시내에 배포했다. 또한 5월 15일경에는 만세교(萬歲橋) 상류의 언덕에 있는 버드나무 수출 부근에서 서울에서 배포된 경고문, 독립선언서, 대한독립협회 ‘일혈비격(溢血飛檄) 2천만 동포’라는 제목의 항일문서에 기초한 ‘독립신문’ 등의 인쇄물을 등사판으로 인쇄했다. 그리고 이를 함흥 시내에 다시 배포했다. 1920년 6월 말경 주배희는 박경구(朴徑九), 채규연(蔡奎淵)의 권유로 김조규(金助圭)와 함께 중국 요녕성(遼寧省) 관전현(寬甸縣)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에 가입했다. 이들은 함경도 일대를 대상으로 대한청년단연합회 함경도의용대를 조직했다. 또한 부서를 정해 항일문서 배포 및 선전, 본부와 교통 및 연락, 군자금 모집, 비밀문서 발송 및 보관, 단언 모집 등의 활동을 담당했다. 주배희는 이 가운데 단원 모집 임무를 맡아 비밀리에 활동했다. 주배희는 함흥에서 3.1운동에 참여해 항일인쇄물을 배포하다가 체포됐다. 1919년 7월 9일 함흥지방법원(咸興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 출판법(出版法) 위반,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공소를 제기해 8월 6일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를 제기했으나 결국 1920년 2월 12일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됐다. 이후 평양형무소(平壤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6월 13일 출옥했다. 이후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 함경도의용대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됐다. 1921년 2월 2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로인해 원산형무소(元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2년 9월 16일 석방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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