池光浩
1918-12-27 ~ 미상·현대
이명·자·호 李中善, 池田光浩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지광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양 숭인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6년 6월 13일 박윤옥(朴潤玉)·김덕윤(金德潤)·연광용(延光榕)·김종린(金鍾麟)·김화식(金華植) 등과 함께 능라도(綾羅島)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 일맥회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일맥회가 회장 연광용의 지도력 부족 등으로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자 박윤옥·김덕윤과 함께 더욱 강력한 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열혈회를 조직하였다. 1937년 2월 초순 자택에서 박윤옥·김덕윤·김종린·김현주(金顯周)·김희만(金熙萬)·이낙인(李洛仁)·김동순(金東舜)과 회합하여 비밀결사 열혈회를 조직하였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조선 민족의 영원한 복지를 위하여 조선 독립을 기한다”는 선언과 회칙 등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회장 박윤옥 이하 임원을 선정했는데, 지광호는 서기(書記)로 선정되었다. 그러던 중 1938년 1월 31일 상급학교 진학 등 진로 결정을 앞두고 각자가 전문분야를 설정해 향후 10년 정도 연구하고 구체적인 활동을 분담하기로 논의하였다. 이때 지광호는 경제부문을 담당하고 서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상과(商科)에 진학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열혈회에서는 각자가 농민의 중심적 지도자가 되어 가까운 장래에 평양 부근의 철도연선(鐵道沿線)에 농민도장(農民道場)을 개설하고, 농촌의 청소년을 규합해 1~2년간 철저히 지도 훈련하여 실력을 양성하고 민족의식과 단결력을 강화하여 독립을 쟁취하자고 맹약(盟約)하였다. 그리고 열혈회원들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약 2년 동안 평양과 서울, 일본 도쿄(東京) 등지에서 각자 동지를 규합하고 회합을 갖는 등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10월 6일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무산대중가(無産大衆歌)」, 「독립가(獨立歌)」, 「대한국국가(大韓國國歌)」 등을 소지한 보성전문학교생 김정필(金正弼) 등이 검거되면서, 이 노래들이 지광호의 하숙집에 숨겨둔 것임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7일에 동료 학생 손석태(孫錫泰)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은 ‘종로 학생독서회 사건’으로까지 확대되어 1940년 2월까지 취조가 계속되었다. 2월 16일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 검사국에 송치되었다가, 26일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지광호가 검거된 1939년 11월 도쿄의 열혈회 조직도 일본 경시청(警視廳)에 발각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광호도 도쿄 열혈회 관계자임이 드러나 1940년 11월 27일 도쿄형사지방재판소(東京刑事地方裁判所)에서 기소(起訴)되었다. 1942년 5월 16일 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는데, 이에 불복하여 18일 공소를 제기하였다. 1943년 1월 18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20일 스가모형무소(巢鴨刑務所)에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8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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