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光華
(1911) ~ 1942-05-28·일제강점기
이명·자·호 金昌華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진광화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1931년 평양상업중학교(平壤商業中學校)를 졸업한 뒤 중국 남경9南京)으로 건너가 남경 오세(五世)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곳에 재학 중 한국 유남경학생회(韓國留南京學生會)의 간사로서 청년의 단결과 사회사업을 위해 활동하였고, 그후에는 남경 한교회(韓僑會)의 중앙간부로 전체 한국 교포들의 단결과 안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29년 사상의 정화와 독립운동의 단결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의 산하단체로 조직된 철혈단(鐵血團)의 단원으로 참가하여 활동하면서 이 단체의 기관지인 <우리 길>을 발간하여 독립사상 고취와 단원들의 훈련, 교양사업에 진력하였다. 1933년 남경을 떠나 광주(廣州)로 간 그는 국립 중산대학(國立中山大學)에 입학하여 교육학을 전공하면서 비밀조직인 조선인용진학회(朝鮮人勇進學會)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항일회(抗日會)의 지도적인 임무를 맡아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후 1937년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1938년에는 산서성(山西省)으로 파견되어 선전극단 단장을 역임하였다. 1939년 4월 진기로예지구(晋冀魯豫支區)에 파견되어 활동하였으며 1941년에는 한국인의 단결을 위해 조직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 진기로예지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화북지방에 진출해 있던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朝鮮義勇隊華北支隊) 지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적후공작에 책임을 지고 활약하다가 1942년 6월 일본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에 맞서 싸우던 마전장(麻田莊) 전투에서 적의 포위를 돌파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3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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