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秉基
1896-03-13 ~ 1935-11-05·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진병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대구(大邱) 협성중학(協成中學)을 거쳐 1911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예비학교와 쭈오우대학[中央大學]을 다니다가 1914년 귀국하여 농업에 종사했다. 1920년 이후 신사상을 수용하면서 1922년 1월 무산자동지회에 가입하고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가했다. 동년 6월 코민테른 꼬르뷰로 국내부가 조직될 때 평양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었으며 평양노동동맹회 결성에 참가했다. 꼬르뷰로 국내부 조직이 발각되면서 그 역시 1923년 9월 일경에 체포되어 1923년 1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평양노동연맹회 집행위원으로 활약하면서 1925년 3월 평양(平壤) 인쇄직공파업 등을 적극 후원했다. 1925년 4월 조봉암(曺奉岩)·김찬(金燦)·김재봉(金在鳳)·박헌영(朴憲永)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 검속되기도 했다. 또한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면서 신의주경찰서에 체포되어 1928년 2월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1년 2월 출옥 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힘을 쏟다가 1935년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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