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希西
(1883)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진희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07년 일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고종황제의 특사를 문제 삼아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나아가 군대해산을 단행하여 한국의 무장력을 해체하였다.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은 자결로 저항하거나 민족적 이해에 눈을 뜬 애국적 군대로 탈바꿈하여 항일 의병투쟁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촉발된 후기의병은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면서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무장력을 바탕으로 전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진희서는 1907년 음력 11월 30일 유성구(劉成九)와 함께 홍순래(洪順來)를 따라 의병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진희서는 홍순래 등 4명의 의병과 함께 총으로 무장하고 수원 발안장(發安場)의 성가(成哥)에게서 군수품으로 화승총 1자루를 거두었고, 아재동(雅才洞)의 안가(安哥)에게서 군자금 10환을 모금하였으며, 산성(山城)의 원가(元哥)로부터는 양총 1자루·화약·탄환 등을 협조 받았다. 그는 1908년 음력 3월 3일에도 의병 7명과 함께 산척리(山尺里)의 이가(李哥)에게서 군자금 12환을 거두었고 100환은 추후에 와서 찾아가겠다는 뜻으로 증표를 받았다. 최가(崔哥)로부터도 군자금 100환 증표를 받는 등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진희서는 1908년 3월 20일 경기재판소(京畿裁判所)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유형 15년을 받고 고초를 치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17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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