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明輪
(1907) ~ 미상·현대
이명·자·호 車明潤, 車明允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차명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8년 3월 4일 개최된 영흥청년동맹 진평지회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회 정치문화부(政治文化部) 소속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이어서 1930년대 초 영흥농민조합 간부가 되어 영흥지역 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 영흥농민조합은 1930년 12월 영흥농민동맹(永興農民同盟)의 부진을 극복하기 위한 무산농민(無産農民)의 단결체를 목표로 개편된 농민운동단체이다. 경제투쟁적 성격의 농민운동에 국한하지 않고 청년부·부인부·소작부·농업노동자부·소년부 등의 부서를 설치하여 폭넓게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31년 10월 영흥농민조합은 9개의 면(面) 단위 지부와 그 아래에 170여 개의 반(班) 조직을 설치했으며 회원이 1만 2,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차명륜은 1931년 7월 24일 영흥군 억기면(憶岐面) 오포리(梧圃里)에서 박용우 외 40~50명의 농민조합원과 함께 피고용인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이른바 ‘머슴파업사건’에 관여했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그러던 중 10월 영흥농민조합이 주도한 시위 도중에 조합원이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대규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영흥농민조합의 간부와 조합원 다수가 검거되는 ‘영흥농민조합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차명륜은 24일 억기면 용천리(龍川里) 자택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었다. 호송 과정에서 용천리 앞 유모로재(柳慕老峙)에 잠복하고 있던 차진상(車鎭相) 등 10여 명이 동지들을 탈출시키고자 낫과 큰 돌을 가지고 경관대에 대항하여, 일반 농민과 일본 경찰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였다. 12월 20일경 검찰로 압송되어 이듬해인 1932년 4월 22일 함흥지방법원(咸興地方法院)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후 예심이 종결되기도 전인 1932년 12월에서 1933년 1월 사이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동지들이 비밀리에 추도식을 거행하려다가 1933년 1월 21~22일에 다시 다수의 청년들이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3월 31일에야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는데, 사망으로 인한 공소기각으로 처리되었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7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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