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仁載
1895-04-26 ~ 1971-04-07·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林仁載, 林仁在, Cha In-Chai, ウロー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차인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이화고등보통학교 출신으로 1920년 6월 경기도(京畿道) 수원군(水原郡)에서 삼일학교(三一學校) 교사로 근무하던 중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선태(朴善泰) 등이 구국민단(救國民團)을 조직하자 참여하여 동지를 규합하였다. 구국민단 조직 발각을 전후한 7월 말 미국으로 이주하여 8월 임치호(林致昊)와 결혼하면서 남편 성을 따라 임인재로 개명하였다. 1921년 3월 맥스웰에서 한국인 아동들의 국어 교육을 위해 교실을 만들고 수업을 하였다. 1924년 대한인국민회 맥스웰지방회 학무로 선정되었으며,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하였다. 1933년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羅省支部) 부단장으로 선정되었다. 1934년 8월에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였다. 1935년부터 로스앤젤레스 삼일국어학교(三一國語學校) 재정모금 수전위원(收錢委員)이 되어 학교 유지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서기로 활동하였다. 1936년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재무와 로스앤젤레스여자청년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7월 대한여자애국단 총부(總部) 서기로 선정되었고, 1937년에는 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서기로 선임되어 1942년까지 7년 동안 활동하였다. 1939년 6월 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집행위원과 총무로 선임된 데 이어, 1941년 동 지방회 집행위원 겸 교육위원으로 선정되어 2년간 활동하였다. 1942년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43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동 지방회 집행위원 겸 총무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4년 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회장으로 선출되자, 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주최한 임시회의에 애국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4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선전과장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9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제6차 회의에 참석하여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문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10월과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위한 전체 대표회를 개최하자,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5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위원,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총무, 연합위원회 군자금 모집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8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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