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琪焌
1896-01-07 ~ 1957-03-01·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기준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라남도 영암(靈岩) 사람이다. 1919년 4월 10일 군서면 서구림리(郡西面西鳩林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시위는 영암읍의 유지인 조극환(曺克煥)·정학순(鄭鶴順)과 서구림의 박규상(朴奎相)·최한오(崔漢五)·조병식(曺秉植)·정학순(鄭鶴順) 등이 중심이 되어 영암 장날인 4월 10일 오전 9시를 기하여 두곳에서 일제히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계획하였다. 이에 구림리의 문죽정(問竹亭)을 임시 연락본부로 정하고, 당시 군서면 면서기인 김재홍(金在洪)·최민섭(崔旻燮)이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태극기 50여매, 독립선언서 6백여매, 독립가(獨立歌) 1백여매를 등사하여 보통학교 학생인 김봉근(金奉根)·김영언(金永彦)·유인봉(柳寅奉)·이종구(李鍾謳)·이지봉(李枝奉)·천병권(千秉權)·진봉재(陳奉才)·박종련(朴鍾連)·채동팔(蔡東八) 등에게 배포토록 하였다. 4월 10일 오전 9시, 그는 조병식 등과 함께 구림 보통학교 교정에서 비상나팔을 불어, 보통학교 학생과 주민들을 불러모은 다음,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때 보통학교 직원들이 이를 만류하였으나, 3백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면사무소와 보통학교 사이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결국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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