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東林
1910-03-07 ~ 1950-10-20·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동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30년대 초 최판옥(崔判玉)·김판권(金判權)·류용희(柳龍羲)·최동환(崔東煥)·최병수(崔秉壽)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영암군 내 사회운동을 지도하였다. 1931년 9월경부터 1932년 5월경 사이에 영암군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에서 야학을 개설하여 청년들을 비롯한 야학생에게 신사회 건설과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932년 3월 7일 최석호(崔碩鎬)·최동환·최병수와 함께 야학회관에서 「아내의 후회」라는 제목의 신파극(新派劇)을 공연하여 다수의 민중이 관람하도록 했다. 일제강점기의 소작권 이동 문제는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 등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으로 인해 조선농민 다수가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문제였다. 최동림은 1932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하여 최판옥·김판권 등과 함께 소작권 이동 반대 시위를 기획하고 운동에 참여하였다. 5월 1일 당일은 일본 경찰의 경계가 심하므로 실제 시위운동은 음력 5월 1일인 6월 4일에 진행하기로 계획되었다. 이들은 영보정(永保亭) 뒷산에서 덕진면 내 청년회원 약 70명과 함께 운암리(雲岩里)·백계리(栢溪里) 방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소작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소작권 이동 방지를 위해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의기투합하였다. 그리고 선두에 적기(赤旗)를 세우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노동가(勞動歌)를 부르며 운암리 방면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중에 경작권을 약탈한 새로운 소작인의 집으로 몰려가 그 행위를 질타하기도 했다. 이 ‘영암농민 데모사건’으로 10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영암경찰서(靈巖警察署)에 체포되었다. 1932년 7월 22일 검찰로 송치되어 1933년 6월 22일 예심이 종결되었다.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지청(木浦支廳)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를 제기하여, 1934년 3월 7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다음날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18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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