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秉心
1874-10-05 ~ 1957-10-03·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병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북 전주(全州) 사람이다. 조선조(朝鮮朝) 유학(儒學)의 저명인(著名人)으로 1905년 전주에 옥류정사(玉流精舍)를 개설하고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렬되자 단식으로 항거하고 토역선참(討逆先斬)의 격문을 작성하여 도처에 붙이는 등 항거하였다. 1912년 호남창의대장(湖南倡義大將) 이석용(李錫庸)이 전남북(全南北) 양도에 걸쳐 일군(日軍)과 항전을 계속하며 독립밀맹단(獨立密盟團)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분담하여 활동할 때 전주(全州) 지방을 맡아 이석용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1918년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함을 간파한 일제가 옥류정사 일대 1,800여평을 잠업시험장으로 조성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협박 강탈하려하자 단식으로 저항하고, 토지강제수용령이 발동되자 결사 항거하였다. 이에 일제가 집 일대에 방화(放火)하였으나 '불에 타 죽겠다'고 버티므로 당황한 일경들에 구출되었으며 그후 토지는 수용되고 말았다. 1920년 조희제(趙熙濟)가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실상을 담은 <;염재야록(念齋野錄)>;을 저술, 발간할 때 서문(序文)을 작성한 것을 빌미로 일경에 붙잡히자 6일간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1942년 일제의 소위 동화정책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반대하고 조상의 성씨(姓氏)를 수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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