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鳳煥
1868-06-24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봉환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남 순천(順川) 사람이다. 일제가 1909년 소위 시장세(市場稅 : 일명 百一稅)라는 악법을 제정하여 상인들의 매상에서 백분지일을 세금으로 수탈하자, 순천지방의 상인들은 이에 대항하여 동년 12월 시장관리인 집을 습격하였으며 관아로 몰려가 항의시위를 펴기도 했다. 상인들은 납세거부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동년 12월 상민회(商民會)를 결성하였는데 당시 보부접장(褓負接長)으로 있던 그는 상무사장(商務社長) 나학도(羅學道)와 함께 상민회의 의장으로 선임되어 시장세 거부투쟁을 주도하였다. 이후 상민회는 한달에 4회나 폐점하는 등 철시투쟁으로 일제에 맞섰다. 상민회가 1910년 1월 29일 시장을 열자 일인 재무서원들은 시장세를 강제 징수하였고 천여명의 군중들은 최봉환의 지도로 항의시위를 폈다. 이때 일인 관리들이 군중에게 발포하여 6명이 순국하고 12명의 부상당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군청에 불을 지르고 악질 세무주사 야택진삼랑(野澤辰三郞)을 비롯한 일인 관리들을 척살하였다. 3천명으로 늘어난 군중들은 다시 순사주재소와 일인 점포를 파괴하고 순천거주 일본인들을 처단하며 항일투쟁의 기세를 높였다. 이일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붙잡혀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되어 2년만에 출옥하였다. 그후 그는 3·1독립운동 당시 표영각(表永珏)·김성호(金聖浩) 등의 기독교인 및 차철수(車喆洙)·김충성(金忠聖) 등의 천도교인과 힘을 합하여 3월 6일 2천여명의 군중들을 주도하며 만세시위 운동을 펴다가 일경에 붙잡혀 시장세 거부투쟁의 가중처벌이 적용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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