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祥鳦
1913-12-15 ~ 미상·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상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9년 11월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광주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광주군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 등 한인 학교와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光州中學校)가 서로 갈등 관계에 있었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로 통학하던 한·일 학생들이 나주역(羅州驛)에서 격투를 벌였다. 11월 3일은 일본의 이른바 ‘명치절(明治節)’이었고 음력으로는 한국의 ‘개천절(開天節)’이었다. 광주 시내에서 감정이 고조된 한·일 학생간에 격투가 벌어졌다. 일본 학생의 칼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최쌍현(崔雙鉉)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를 본 최상을은 현장에 달려가 일본 학생을 응징하였다. 이때 최상을도 일본 학생의 칼에 부상을 당하였다. 일본 학생들이 광주역 앞으로 도주하여 이곳에서 다시 학생 수십 명의 집단 격투가 벌어졌다. 격투 후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인 학생들이 광주시내를 시위행진하며 사기를 높였다. 최상을은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저지하는 일제 경찰에 저항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한인 학생들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일제의 편파적인 조치에 항거하여 11월 12일 2차 시위운동이 추진되었다. 전남청년연맹(全南靑年聯盟) 간부인 장석천(張錫天)·장재성(張載性) 등의 지도로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전남사범학교(全南師範學校) 학생들이 격문을 제작하는 등 시위를 준비하였다. 11월 12일 첫 수업이 시작되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교문 밖으로 진출하였다. 최상을은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하였다. 학생들은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부르며 시내 우편국과 형무소를 거쳐 전남사범학교 앞까지 시위 행진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193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상해’ 등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아 1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1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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