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錫龜
1864-11-24 ~ 1922-02-09·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석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황해도 수안(遂安) 사람으로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919년 3월 3일 안봉하(安鳳河)·김영만(金永萬)·나찬홍(羅燦洪)·최용식(崔鎔植) 등과 수안군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곳의 만세시위는 서울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던 3월 1일, 곡산(谷山)의 천도교인인 이경섭(李景燮)에 의하여 독립선언서가 수안읍 천도교구장인 안봉하에게 전달되면서 계획이 진행되었다. 이날 안봉하·김영만·나찬용·최용식·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禎)·한청일(韓淸一) 등 천도교 관계자들이 모여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튿날 천도교 시일집회(侍日集會)를 이용하여, 김동선(金洞宣)·이달하(李達河)·나용일(羅龍日)·장성도(張聖道)·홍두옥(洪斗玉)·안창식(安昌植)·홍길재(洪吉載)·이윤식(李潤植)·홍두익(洪斗益)·이응호(李應浩) 등이 교구실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3월 3일에 군내 각면의 천도교도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구체적인 결정을 보았고, 또 헌병의 퇴거도 요구하기로 하였다. 이에 만세시위의 연락·준비·진행을 담당한 한청일과 홍석정은 몰래 태극기를 만들고, 한편으로는 대천(大千)·오동(梧洞)·연암(延岩)·공포(公浦) 등 각면의 교도들에게 연락하였다. 그러나 만세시위 계획을 미리 눈치 챈 헌병대에서 안봉하·김영만·나찬홍 등 대부분의 주동급 인사들을 체포하여 갔다. 그러나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는 계획대로 감행되었다. 3월 3일 새벽 6시, 그는 읍내의 천도교교구실 앞에서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2개의 대형 태극기를 선두로 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고, 헌병분견소로 가서 헌병중위 길야광(吉野匡)에게 조선은 독립되었으니 퇴거할 것을 요구하여 퇴거약속을 받아냈다. 오전 11시 각면으로부터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한 시위군중이 계속 모여들어 사기가 오르자 군중은 헌병분견소로 달려가 또다시 헌병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태의 긴박함을 느낀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오후 1시경 군중이 다시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나 일제의 무력저지로 해산되었다. 그후 그는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었으며,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혐의로 1년 3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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