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錫九
(1869) ~ 1920-08-04·대한제국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석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3월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에서 천도교 교구장 안봉하(安鳳河) 및 한청일(韓淸一)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동년 3월 1일 안봉하는 곡산(谷山)의 천도교인 이경섭(李景燮)에게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에 관한 연락을 받았다. 그는 즉시 한청일·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禎) 등 천도교 관계자를 소집하여 독립선언서를 각지에 전달하고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몇 차례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3월 3일을 기하여 각 면의 천도교인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이고 동시에 일제 무력기관인 수안헌병분대(遂安憲兵分隊)를 쫓아내기로 결의하였다. 이어 만세시위의 연락, 준비, 진행 등 모든 실천방법을 한청일, 홍석정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미리부터 감시를 엄중히 하고 있던 헌병대에게 걸려 안봉하 등 주도급 인물들이 검속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검속당하지 않은 한청일 등은 계획대로 밀고나가 마침내 3월 3일 오전 6시경 읍내 천도교 교구소 앞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일 수 있었다. 주동 인물들은 중앙에 2개의 큰 태극기를 세우고 13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금융조합 앞 길을 지나 헌병분대로 행진하였다. 최석구도 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시위행진에 참가하였다. 헌병분대에 도착한 이들은 조선은 독립을 선언했으니 속히 분대를 내놓고 물러가라고 요구하였다. 당황한 일본 헌병은 본부에서 연락이 오는 대로 곧 물러가겠다고 서약하였다. 시위군중은 환성과 함께 만세를 더욱 소리 높여 부르며 읍내를 돌아 천도교 교구소로 돌아왔다. 교구소에는 각처에서 모여든 시위대열로 군중은 아침보다 몇 배 더 증대되었고, 읍내는 온통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흥분한 군중은 헌병대를 쫓아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나섰다. 최석구는 이동욱(李東郁) 등과 함께 앞장을 서고, 이재관(李在觀) 등 수십 명이 따라 나섰다. 100여 명의 선봉대열은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분대로 행진하였다. 오전 11시경 헌병분대 앞뜰에서 재차 이들의 퇴각을 요구하며 몰려 들어갔다. 당황한 일본 헌병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사상자가 속출하자 대열은 무너졌다. 오후 1시경 흩어진 시위군중은 다시 모여 읍내를 돌며 만세시위를 감행하였다. 한청일, 홍석정이 시위 군중을 지휘하고 동지 10여 명이 선두에 나서자 150여 명이 합세하여 다시 헌병분대로 몰려갔다. 이들은 적의 만행을 항의하며 억류된 주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헌병대로 돌진하여 문간에 설치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헌병대의 퇴거를 격렬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헌병대는 다시 시위 군중을 향하여 실탄을 무차별 발사하였다. 이 만세시위운동으로 즉사자 9명, 중상자 18명이 발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최석구는 이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신음하다가 1920년 8월 4일 새벽 2시경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9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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