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碩淳
미상 ~ 1925-02-25·조선
이명·자·호 崔碩俊, 崔錫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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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석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만주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조직되었을 때에 집서지단장(輯西支團長)으로 활동하였다. 최석순이 활동했던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의병장들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역량을 기르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 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한독립단에서는 창립총회에서 창립선언문과 함께 전문 22조의 규칙을 통과시키고 다음과 같은 임원을 선정하였다.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白三圭),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참모 송상규(宋尙奎)·강규묵(康圭默)·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부총무부장 강유상(康有常), 총무원 김일(金鎰)·한관모(韓寬模),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 재무 이병기(李炳基), 회계 홍주(洪疇), 사법부장 이웅해(李雄海), 교통부장 양기하(梁基瑕) 등이다. 최석순이 활동한 대한독립단은 이 시기 만주지역 대부분의 독립운동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무장투쟁을 통하여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무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는 것은 절대적이었다. 이를 위해 군자금의 모집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대한독립단에서는 유하현 삼원보에 위치한 본부 및 국내, 서간도의 각 지단에 재무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만주와 국내에서의 일본인 및 친일파 숙청 그리고 일제기관 파괴 등도 전개하는 한편 국내에 대한독립단의 지단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 최석순은 1922년 8월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여기에도 가담하였다. 대한통의부는 동년 8월 23일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와 그에 참여하지 못한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이루어진 1920년대 전반기 남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단체의 주요 간부로는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相悳), 비서과장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응해(李雄海), 검무부장 최명수(崔明洙), 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사판소장 이영식(李永植),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식산국장 박득산(朴得山), 권업부장 강제하(康濟河),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교통국장 황동호(黃東浩),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을 들 수 있다. 대한통의부는 1923년 12월에 조직을 개편하여 보다 군사적인 면에 비중을 두었다. 당시 개편된 조직을 보면, 총장 김동삼, 비서과장 고활신, 민사부장 이웅해, 군사부장 이천민, 이용군 사령관 김창환(金昌煥), 부관 김창훈(金昌勳), 군수국장 맹철호(孟喆鎬), 군무국장 이종건(李鍾乾), 호위국장 문학빈(文學彬), 재무부장 오동진, 학무부장 이병기(李炳基), 법무부 검무국장 김신택(金信澤), 사법국장 현정경, 교통부 교통국장 황동호, 실업부장 변창근 등이었다. 최석순은 대한통의부에서 의용군 제2중대장으로 활발한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와 함께 의용군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보면 제1대대장 강남도(姜南道),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1소대장 김보국(金保國), 제2소대장 전봉도(全奉道), 제3소대장 김기준(金基準), 제2중대 제1소대장 김전(金田), 제2소대장 이규성(李奎星), 제3소대장 신태봉(申泰鳳), 제3중대장 최시흥(崔時興), 제4중대장 홍기주(洪基柱), 제1소대장 장세룡(張世龍), 제2소대장 김국보(金國輔), 제3소대장 신홍영(申洪永) 등이었다. 1923년 최석순은 대한통의부를 탈퇴하여 참의부(參議府)에 참여하였다. 참의부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이념문제로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었을 대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통의부 의용군내 제1·2·3·5중대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한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는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참의부는 중앙의회를 가지고 군사와 민정을 아울러 통괄하는 단체였다. 최석순은 참의부 창설 당시 제2중대장으로, 참의장 겸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3중대장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 김창대(金蒼大), 훈련대장 박응백(朴應伯)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한편 참의부는 조직된 이후에 대한통의부 및 의군부와 갈등 과 반목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이들과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참의부의 설립 주체이며 참의부의 대표인 참의장 겸 제1중대장이었던 채찬이 1924년 겨울 통의부 유격대 문학빈(文學彬) 휘하의 백병준(白炳俊)·백세우(白世雨) 등에게 참살당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참의부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조직을 개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참의부에서는 체제를 정비하였는데, 이 때 최석순은 참의장(參議長) 겸 제2중대장으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때 최석순과 함께 참의부를 이끌었던 인물들은 제1중대장 김선풍(金旋風), 제3중대장 박응백(朴應伯), 제4중대장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 김창천(金蒼天), 독립소대장 김우근(金宇根), 훈련대장 박응백, 민사부장 김소하 등이었다.최석순은 1925년 3월 만주 집안현 (輯安縣) 고마령(古馬嶺)에서 전창희(田昌禧), 최항신(崔恒信) 등 29명과 함께 국내진입작전을 위한 회의에 참가하였다. 이 정보를 탐지한 초산(楚山)경찰서에서는 연담(蓮潭)주재소 경부보(警部補) 수야택삼랑(水野宅三郞)의 지휘로 순사부장 고피득(高彼得), 밀정 박죽파(朴竹坡) 외 총 65명이 6개 분대를 조직하고 김명준(金明俊)을 체포 고문하여 참의부 통신원임을 자백 받은 후 고마령 산중에서 회의를 하던 참의부원들을 습격하였는데, 이 때 최석순은 동지 28명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95
대통령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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