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聖模
1874-01-09 ~ 1937-03-14·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성모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황해도 해주(海州)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일찍이 서울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북감리교(北監理敎) 목사가 되어, 해주의 남본정교회(南本町敎會)에서 목자생활을 하였다. 이 때 그는 전도와 신앙심으로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는데 노력하였다. 1919년 2월, 당시 중앙기독교청년회(中央基督敎靑年會) 간사로 있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해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기로 하였다. 2월 26일 이승훈(李昇薰)·오화영(吳華英)·이필주(李弼柱)·함태영(咸台永)·안세환(安世桓)·이갑성(李甲成)·박희도 등 기독교측 대표들과 한강(漢江) 인도교에서 만나,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에 서명 날인할 기독교측의 대표자를 뽑았다. 이튿날인 27일에는 그의 집에서 이승훈(李昇薰)·오화영·박희도·이갑성·함태영·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 등의 기독교측 대표들과 다시 만나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회람한 후, 이에 찬성하여 기독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천도교(天道敎)·기독교·불교(佛敎)측의 민족대표들과 만나, 독립운동계획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민중교화사업과 전도사업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62
대통령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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