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聖天
(1884) ~ 1910-12-08·대한제국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성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충북 충주(忠州) 사람이다. 처음 김상태(金相泰) 의진에 참여하였고, 이후 의병장으로 경북 예천(醴泉)·봉화(奉化)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김상태 의병장은 충북 영춘(永春) 출신으로 1차 의병과 2차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이다. 1895년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이듬해 이강년(李康秊)이 문경에서 거의하자 김상태는 그와 형제지의(兄弟之誼)를 맺고 이 의진의 중군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05년 을사륵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자, 김상태는 즉각 동지 정운경(鄭雲慶)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1907년 7월 이강년이 다시 거의하자 이 의진과 합진하였다. 이후 1908년 6월 4일 청풍(淸風) 까치재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붙잡히자 김상태 의병장은 군사 지휘권을 인계받아 대일항전을 지속하였다. 최성천은 이같은 김상태 의진에 1908년 6월 경부터 참여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듬해 3월 김상태 의병장과 더불어 단양(丹陽)군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8월 25일에는 경북 봉화군 물야(物野)면 개단리(皆丹里)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밀정 권흑이(權黑伊)의 밀고로 붙잡혔다가 탈출하여 같은 달 30일 권흑이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의 의병탄압이 가열되자 최성천은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하는 소부대 유격전으로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김상태 의병장과 함께 소백산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이 때 김상태 의병장은 소부대 유격전에 맞게 의진을 분진하였으므로 최성천은 의병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0명 내지 20명 정도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김상태·한명만(韓明萬)·정경태(鄭敬泰)·윤국범(尹國範) 의진과 더불어 소백산을 근거지로 대일 항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1910년 1월 2일 경북 봉화군 물야면 서리에서, 그리고 2월 6일에는 같은 수곡리에서 군자금 수합활동을 하였다. 나아가 같은 해 3월 26일에는 2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북 예천군 왕천(汪川)시장에서 군수금품을 징발하는 한편 일본인 산내은삼랑(山內銀三郞)을 처단하였다. 이같은 의병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1910년 9월 21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자 공소, 그해 11월 12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12월 8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5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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