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順乭
(1881)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순돌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충남 면천(沔川) 사람이다. 오양선(吳陽善) 의진에 가담하여 충남 보령(保寧)·청양(靑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같은 해 8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최순돌은 이같은 시기에 오양선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동지 70여 명과 함께 1908년 9월 11일 충남 보령군 청라면(靑蘿面) 의평(蟻坪) 노상에서 친일 이장 이성유(李聖有)를 구타하고 군자금을 거두었다. 이어 그는 1909년 4월 4일 밤 동지 14∼15명과 함께 총검으로 무장하고 같은 군 익랑동(益廊洞)에서, 8월 31일 밤 충남 청양군 남하면(南下面)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9년 10월 4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1월 19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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