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昇宇
1915-12-27 ~ 미상·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승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43년 12월 중경(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려다 발각되어 강제 귀국당했으며, 1944년 강제징용 반대 격문 배포, 유명 친일파와 조선총독 암살 등을 계획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3년 12월 정문규(鄭文圭)의 권유로 김중일(金重鎰)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혁명가가 될 것을 결의하고, 서울에서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려다 중국 산해관역(山海關驛)에서 발각되어 귀국하였다. 1944년 4월 초순 경성부(京城府) 동대문(東大門) 안암정(安岩町)에 소재한 처 가 유해창(柳海昌)의 집에서 정문규와 회합하여 조선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 을 협의하였다. 그 방법으로 동지 6, 70명을 획득한 후에 운동조직으로써 수령 (首領) 아래 파괴부(破壞部) 및 건설부(建設部)를 두며, 전자는 파괴·암살·선전 의 반을 두어 중요 공장,은행 등의 파괴,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 등을 비롯하 여 한상룡(韓相龍), 윤치호(尹致昊), 이광수(李光洙) 등 친일 조선인의 처단, 폭 동을 위한 격문의 작성·살포 등을 담당했다. 건설부는 법경(法經), 문화(文 化), 정법(政法)의 세 반을 설치하여 독립실현 후 건설적 부분을 담당하는 연구 준비를 할 것을 협의하였다. 동년 7월 초순 경성부 동대문구 창신정(昌信町)에 소재한 송원무(松原茂)의 약혼자 금전화봉(金田華峰)의 집에서 정문규와 함께 공장 폭파에 사용할 폭탄 제조 방법을 오상흠(吳相欽)에게 의뢰하였다. 동년 7 월 하순 같은 장소에서 정문규와 함께 "조선청년 다수가 징용당하면 조선독립 의 때에 유위(有爲)한 청년을 상실하게 되므로 징용반대 격문을 살포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동년 8월 하순 경기도 부천(富川) 소사리(素砂里) 정문규의 집에서 동인과 함께 조선총독이 유한제약주식회사(柳韓製藥株式會社) 공장에 시찰을 하기 위해 내방한다는 것을 알고 그때가 암살의 호기라는 의견 을 교환하였다. 동년 9월 상순 정문규의 집에서 정문규와 함께 징용반대 격문 을 작성하여 경성역을 출발하는 열차 내에 그것을 살포하기로 협의하였다. 동 월 중순 같은 장소에서 조선총독이 조선총독부에서 관저로 돌아오는 길인 경성 부 종로구(鐘路區) 통의정(通擬町)과 효자정(孝子町)의 중간 전차 도로상에서 그를 처단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1944년 10월 23일 인치되어 1945년 7월 23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 구류 7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3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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