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禮鎭
1913-02-16 ~ 미상·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예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8년 5월 함경남도 함흥부(咸興府) 함흥공립상업학교 2학년에 재학 중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항거하여 동맹휴학을 전개하였다. 최예진은 동맹휴학에 반대한 학우를 응징하는 등의 활동으로 인하여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방면되었다. 1929년 11월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동조시위, 동맹휴학 등으로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최예진은 학우들과 함흥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의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원주연(元鑄淵)·윤치선(尹致善) 등의 학우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1930년 1월 14일을 기해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이들은 “최상의 목적 조선의 독립”, “모여라! 우리 전사여 영광의 깃발 아래로”라고 기재한 2종류의 적기(赤旗)를 제작하였다. 또한 항일 격문 200여 매도 인쇄하는 등 치밀하게 시위를 준비하였다. 마침내 1월 14일 아침 조례 후 최예진은 “조선학생 만세”를 소리높여 외쳐 학생들을 선도하였다. 이를 신호로 2~3학년 학생 6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들은 시내로 진출하여 신탄시장(薪炭市場) 등 번화가를 거쳐 경찰서 앞까지 시위행진하였다. 최예진은 큰 깃발을 앞세우고 선두에서 시위를 이끌었다. 시가행진 도중 미리 준비한 항일격문을 거리에 살포하였다. 학생들은 저지하는 일본 경찰과 격투 끝에 해산했는데, 일제는 소방대까지 출동시켜 학생 20여 명을 검거하였다. 최예진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경찰의 심문과정에서도 당당하게 시위의 목적을 밝히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30년 2월 1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같은 해 3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함흥청년동맹(咸興靑年同盟)에 관여했다가 1931년 3월 일제 경찰에 일시 검거되기도 했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21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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