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六得
1909-04-16 ~ 미상·현대
이명·자·호 金光燮, 淸山秀雄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육득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8년 4월 전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7월 동맹휴교의 주도자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9년 4월경에는 남원청년동맹(南原靑年同盟) 집행위원에 선출됐다. 이후 1930년 6월경 익산군(益山郡) 춘포면(春浦面) 쌍정리(雙亭里)의 서재석(徐在錫)의 집에서 서재석을 만났다. 서재석은 마름의 중간착취를 없애기 위해 농민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며 지주, 마름, 소작인들 간에 이해(利害)관계와 관련 문제에 대해 말했다. 서재석은 최육득에게 농민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고, 최육득은 이에 찬성해 농민운동의 실행을 협의했다. 12월 중 최육득은 전주군(全州郡) 삼례면(參禮面)에 있는 익옥수리조합(益沃水利組合) 배수로 문 부근의 소나무숲에서 문은종(文殷鍾)을 만났다. 이들은 다음날 전주제사공장(全州製絲工場) 앞에서 공장의 여성 노동자 등과 만나 공산주의적 지도에 대한 권유를 받고 이를 실행할 것을 협의했다. 그 직후 송동교(宋東敎), 임갑례(林甲禮) 등 여성 노동자들을 전주 읍내 황일순(黃一順)의 집에서 여러 차례 만났다. 이들은 공장주가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결함을 지적했다. 또한 여성 노동자들을 일치단결시켜 계(稧)를 조직함으로써 적은 금액이라도 파업기금을 마련할 것을 권유하고, 상애계(相愛稧)를 조직하도록 했다. 이후 1931년 5월경에는 김철주(金鐵柱), 한종식(韓宗植) 등이 중심이 돼 시작된 전북조선공산당(全北朝鮮共産黨) 재건 운동에 참여했다. 최육득은 동맹휴교로 인해 체포돼 7월 30일 전주지방법원(全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폭력행위(暴力行爲) 등 처벌(處罰)에 관한 건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전북조선공산당(全北朝鮮共産黨) 재건 운동에 참여했다가 재차 체포됐다.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옥고를 치르다가 1935년 12월 2일 석방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