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仁植
(1883)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인식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최인식은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금천군에서는 3월 3일 서천면(西泉面) 시변리(市邊里)에 독립선언서를 붙인 일이 있었고, 7일에는 토산(兎山)지역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들의 만세시위도 있었다. 그러나 만세운동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그 해 4월부터였다. 4월 1일에 먼저 백마면(白馬面) 용성리(龍城里)에서 이상로(李祥老) 등 80여 명이 집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러 기세를 올렸다. 이튿날인 2일부터는만세시위가 점점 크게 전개되었다. 오후 1시경에 백마면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80여 명은 다시 현내면(縣內面) 송정리(松亭里) 방면으로 진출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개시했다. 이날 합탄면(合灘面) 매후리(梅後里) 부근과 고동면(古東面) 구성리(鷗城里)에서도 2차례에 걸친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튿날인 4월 3일 오후 2시경에는 현내면 송정리에 다시 300여 명이 집합하여 역시 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하여 헌병주재소로 나아갔다. 같은 날 새벽에 구이면(口耳面)의 관문리(冠門里), 문성리(文城里) 주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헌병주재소로 나아가 충돌이 빚어졌다. 금천군의 만세운동은 5일, 6일에도 계속되었다. 산외면(山外面) 신명리(新明里)에서는 6일에 600여 명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최인식은 8일에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최인식은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瑞興支廳)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했다. 그러나 평양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연달아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2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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