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泰龍
미상 ~ (1920)·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태룡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북 무산(茂山) 사람이다. 1900년 진위대(鎭衛隊) 하사로 활동하였으며, 1905년 일제에 이하여 외교권이 박탈당한 뒤에는 이범윤(李範允)이 이끄는 충의대(忠義隊)에서 부교(副敎)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의군산포대(義軍山砲隊) 제2중대 제1소대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활동한 의군산포대는 일명 의군단(義軍團)으로 3·1운동 후 북간도(北間島)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통칭 의군부(義軍府)·의군단(義軍團)이라고도 하였다. 처음 근거지는 왕청현(汪淸縣) 초모정자(草帽頂子)였으나 봉오동(鳳梧洞) 전투 이후 왕청현 명월구(明月溝)로 이전하였다. 의군단의 주요 간부는 본부의 경우 총재 이범윤(李範允), 총사령 김현규(金鉉圭), 참모장 진학신(秦學新), 총무부장 최우익(崔友翼), 군사부장 김청봉(金淸鳳), 외교부장 신립(申立), 통신부장 지우강(池雨江) 등이며, 중부(中部)의 경우는 참모장 고평(高平), 서무부장 이을(李乙), 재무부장 김종헌(金鍾憲), 외교부장 김종환(金鍾煥), 통신부장 박재(朴在), 군법원장 허승완(許承完), 헌병대장 최상운(崔尙雲), 군의감독(軍醫監督) 강문주(姜文周) 등이었다. 최태용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1920년, 일제의 간도출병이 있었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이 지역에 근거하여 국내에 진공하고 있는 한국독립군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간도침입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20년 10월 2일 왕사해(王四海) 등을 두목으로 한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그들의 훈춘(琿春) 영사관 분관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이를 구실로 일본정부는 영사관 및 거류민 보호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1920년 10월 7일 급속히 군대를 간도로 출병시켰다. 출동지구는 제1 훈춘방면, 제2 왕청(汪淸)방면, 제3 용정(龍井)방면, 제4는 도문강(圖們江) 대안부근이었다. 훈춘방면은 기림(磯林)소장이, 왕청방면은 대촌(大村)대좌가, 용정방면을 동소장(東少將)이, 도문강 대안은 경찰관, 헌병 및 수비대에서 수시로 강을 건너 진출하여 독립군을 소탕할 계획이었다. 즉 일본은 동쪽에서는 블라디보스톡 파견군인 제11, 13, 14사단의 6,000여 명, 서쪽에서는 관동군의 보병과 기병을 합한 1,200여 명, 남쪽에서는 조선군 제19사단에서 9,000여 명, 제20사단에서 700여 명, 북쪽에서는 북만주에 파견되었던 안서(安西)지대의 1,000여 명의 병력 등 합계 약 18,000명에서 20,000명으로 추정할 수 있는 병력을 사방에서 침입시켰다. 이들 침략군들은 1920년 10월 12일부터 간도를 향해 4면에서 포위해 들어왔다. 일본군은 이 작전에서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 대한 보복 행위로 독립군의 모체인 한인사회와 항일단체·학교·교회 등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여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불리는 간도지역의 한인 참살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 때, 최태룡은 부하 수명과 함께 안도현(安圖縣있) 방면으로 이동 중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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