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興大
미상 ~ 1909-01-19·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최흥대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의병(義兵)으로 황해도(黃海道) 연안(延安)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로 국권이 피탈되고,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재개하였고, 특히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민족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 같은 시기에 최흥대는 황해도 평산 출신인 이근수(李根守 혹은 根秀) 의진에 참여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근수는 1907년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진용(李鎭龍) 의진의 부장(部將)으로 평산·해주 일대에서 적과 30여 차례 교전하는 등 활동하다가 1909년 연안(延安)·청단(靑丹)을 거쳐 남방 연안 도서로 진출하였다. 이 일환으로 의진은 1909년 1월 19일 새벽 약 60여 명의 병력을 두 척의 배로 나누어 증산도(甑山島) 방면에서 연평도(延坪島) 북부로 상륙하여 해를 보내고자 하였다. 최흥대는 이때 참여하여 분대장(分隊長)으로 활약하였다. 당시 이근수 의진의 지휘·편제는 총대장(總大將) 이근수, 중대장(中隊長) 공석두(孔石斗) 분대장(分隊長) 최흥대(崔興大)·서여선(徐汝善)·원광덕(元廣德)이었다. 그러나 이미 연평도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 수비대와 동일 정오부터 약 5시간 여에 걸친 치열한 교전 끝에 최흥대는 이근수 이하 45명의 의병들과 함께 전사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3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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