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聖洙
1920-08-18 ~ 1945-05-13·일제강점기
이명·자·호 韓成洙, 李相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한성수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신의주(新義州) 사람이다. 학도병으로서 중국 서주에 배속된 일본군부대를 탈출하여 부양(阜陽)에 있는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1944년 11월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의 특명으로 화남지역(華南地域) 공작책으로 임명을 받고 주로 상해(上海)를 중심으로 적의 엄중한 감시와 경계를 피해 가면서 무전통신 작전을 수행하였다. 1945년 3월 13일 새벽에 반역자 손(孫)모의 밀고로 상해(上海)에서 홍순명(洪淳明)·김영진(金永鎭)·박윤석(朴允錫)·허암(許岩) 등과 함께 체포되어 상해 주둔 일 군법회의에 기소되었다. 비공개로 개정된 재판에서 그는 일어 사용을 강력하게 거부하여 부득이 일어 통역을 불러 와서야 재판은 속개되었는데, "너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학병 출신인데 왜 국어를 쓰지 않는가"라는 재판장의 물음에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은 일본어를 국어라 하지만 나의 국어는 아니고 원수의 말이다. 나의 국어는 오직 한국말일 뿐이다."라고 소리 높여 답변했다. 그리고 재판장의 "대동아전쟁을 어떻게 보는가? 너희들은 대일본 제국이 이번 전쟁에 승리할 것을 믿고 있겠지"라는 물음에도 그는 태연자약하게,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기필코 패전하고야 만다. 미·영·중·소 등 연합국의 합동작전으로 태평양 방면은 물론 인면(印緬)전선과 중국전선에서 참패하고 머지 않아 무조건 참패할 것이다. 그때 가서는 대한민국을 독립시켜 주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이며, 한국 독립군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무수히 희생을 당한 것과 같은 고초를 침략자인 너희들도 당하고 말 것이다."라고 분노의 음성으로 일갈(一喝)했다. 이 군법회의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1945년 5월 13일 남경(南京) 형무소에서 참수형(斬首刑)을 당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77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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