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震
(1914) ~ (1943-12)·일제강점기
이명·자·호 胡哲明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한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기도 사람이다. 1935년 일본 동경(東京)에서 공인(工人)으로 지내다가 애국단(愛國團)에 참가하였다. 그후 중국에 망명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7년 12월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성자(星子) 강릉분교(江陵分校)에 입학하여 1938년 5월 동교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6월 김학무(金學武) 등이 조선민족혁명당 간부진의 관내(關內) 안주노선(安住路線)에 반발하여 탈당하여 한구(漢口)에서 1938년 9월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을 결성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38년 10월 무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결성되자, 조선청년전위동맹 소속원들과 함께 제2구대 제2분대 부분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조선의용대 제2구대는 제1전구와 제5전구에서 나뉘어 활동하였는데, 그가 소속된 제5전구는 호북성(湖北省) 북부, 하남성 남부, 안휘성 서부 등지를 관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호북성 중국군 제5전구 최전방에서 항일선전활동에 종사하였다. 또한 신사군(新四軍) 대흥산(大興山) 정진종대(挺進縱隊)와 연계하여 조선의용대 내에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 지부를 건립하고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41년 이후 조선의용대가 화북(華北) 팔로군(八路軍) 지역으로 이동하자, 조선의용대 제1지대 제1전구 사령부 정치조리원(政治助理員), 1942년 7월 이후에는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화북지대(華北支隊) 제3대인 진기예부대(晉冀豫部隊) 정치지도원으로 태항산구(太行山區)에서 대원 60여 명을 거느리고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부상을 입었으며, 1943년 12월 파상풍으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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