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樸
1871-02-20 ~ 1919-03-24·대한제국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허박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라북도 임실(任實)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任實郡屯南面獒樹里)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李起松)·오병용(吳秉鎔)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리 장터에서 천도교도·기독교도가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高宅基)가 출동하여 주동자인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이병렬(李秉烈)·김일봉(金一奉) 등 8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겁에 질린 일본인 순사 촌정(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자, 그는 다시 장터로 돌아와서 2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면장·면서기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에 도착하여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金永弼) 등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고 나와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南原) 헌병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응원 출동한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되었으며,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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