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悳裕
1887-03-06 ~ 1947-06-25·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洪德裕, 洪悳祐, 笑竹, 蘇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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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홍덕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6년 시베리아,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1919년 국내로 돌아왔다. 1922년 11월 민립대학기성준비회 준비위원, 1923년 7월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결성 참여, 1924년 9월 조선기근대책강구회 준비위원을 역임했다. 같은 해 11월 화요회(火曜會)에 참여했으며 조선공산당 중앙총국의 국내부에 가입했다. 한편 홍덕유는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됐으며, 4월 17일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이어 5월 16일에는 조선공산당 경성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됐다. 1925년 11월 ‘신의주 사건’으로 제1차 조선공산당이 붕괴된 이후에는 제2차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다. 또한 1926년 초 상하이(上海)에서 국내로 공산주의운동 지원금을 들여오는 데 관여했다. 3월부터 5월까지는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 당시 조선공산당 검사위원회 검사위원과 서울 야체이카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5월 말~6월 초에는 상하이의 조선공산당 망명인들로부터 항일적인 격문을 들여오는 데 일조했다. 한편 6.10만세운동 준비에 관여했다. 1927년에는 옥중에서 권오설(權五卨) 등과 함께 종로경찰서 경관 4명의 가혹한 고문에 맞서 ‘폭행・학대・직권남용 죄(暴行凌虐瀆職罪)’로 고소했다. 출옥 직후인 1930년 2월 20일 서울 인의동(仁義洞 ), 연지동(蓮池洞), 충신동(忠信洞), 효제동(孝悌洞)을 중심으로 활판으로 찍은 항일격문을 배포하는 데 관여했다는 혐의로 다시 체포됐다. 한 달여간 취조를 받았으나, 이후에도 1943년 화요파 공산주의자그룹 결성 참가 등 공산주의 운동을 이어나갔다. 홍덕유는 1926년 6.10만세운동 준비과정이 발각돼 촉발된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됐다. 1928년 2월 13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0년 1월 1일 석방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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