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秉箕
1869-11-05 ~ 1949-01-27·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홍병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울 종로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어려서 한학에 능통했으며 동학에 입교해서는 교리를 연구하고 수도에 정진하였다.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에는 간악한 탐관오리와 포악한 토반들을 물리치는데 앞장섰다. 그 후 천도교 도사(道師)로 교세확장 구국운동을 계속했으며, 국권침탈 후에는 조국광복과 항일운동에 더욱 전념하였다. 조국의 독립운동 기운이 점차 고조되던 1919년 2월 25일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을 배관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천도교 대표들과 만나, 독립만세 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해 듣고 이에 찬성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하기로 결심하였다. 27일 재동(齋洞)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오세창·최린(崔麟)·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와 다시 만나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이튿날인 28일 밤 재동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 준비사항을 최종적으로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주(滿洲)로 망명, 1926년 길림성(吉林省)에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창당에 참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신의주(新義州)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62
대통령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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