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承泯
1872-12-06 ~ 1908-08-11·대한제국
이명·자·호 洪承學, 洪承沖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홍승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라남도 나주(羅州) 출신이다. 청일·노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추진하였다. 드디어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비밀각서에 의해 8월 1일 한국 군대마저 해산되자, 홍승민은 사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전해산(全海山) 의진에 입대하였다. 전해산 의진은 기삼연(奇參衍)의 휘하에 놓여 그 지휘를 받아 왔다. 연합의진이었기 때문에 서로 공로를 앞세웠으므로 종사의 역할이 쉽지는 않았다. 특히 조경환(曺京煥)과 전해산의 갈등이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어 후에 이들이 분진하게 될 소지가 있었다. 그러한 상황이었지만 이들은 나주·창평(昌平)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에 호남 의진의 고광순(高光洵) 의진이 무너져 고광순 형제가 순국하고, 기삼연마저 체포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그후 의진은 김 준(金準, 泰元)에 의하여 영솔되었으며 전해산은 이석용 의진과 합진하여 장성(長城)에서 활약하였다. 4월에 김 준이 전사하자, 잔여 의병은 오성술(吳聖述)과 조경환에 의해 지휘되었으므로 그들을 도와주고자 했던 전해산 의진은 1908년 7월 이후 완전히 독립 의진이 되었다. 홍승민을 비롯한 전해산 의진은 7월 25일 불갑산(佛甲山)에서 적과 접전하여 적 수 명을 포살(砲殺)하였다. 이어 7월 25일 나주 석문(石門)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며 8월 11일 나주공산면(公山面) 남창골(南昌)에서 적과 교전이 있었는데 홍승민은 적과 접전 중에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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