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鍾善
(1837) ~ 미상·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홍종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기도 가평(加平) 사람이다.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가하여 경기도 가평·춘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홍종선은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의병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1907년 7월 광무황제가 퇴위 당하고,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라 군대까지 해산되는 등 준식민지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이 재봉기하여 일제에 대항하여 갔다. 특히 중부지방에서는 을미의병을 일으켜 문경에서 안동부 관찰사를 처단하였던 이강년 의병장이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김상태(金尙台)를 비롯한 백남규(白南奎)·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鉉)·김운선(金雲仙) 등 유능한 해산군인과 합류하여 대부대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1907년 12월(음) 이강년 의병진은 홍종선의 동리 부근에 유진하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마침내 의병활동을 통해 국권회복의 기회만 모색하고 있던 홍종선에게도 의병참여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이에 그는 이강년 의병진에 참여하여 가평과 춘천 지역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는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08년 정월(음) 강원도 춘천군(春川郡) 사내면(史內面) 방면에 가서 군량(軍糧)을 모집하다가 불행히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1909년 2월 4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 2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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