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鳳信
(1887) ~ 1918-05-01·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황봉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황해도 평산(平山) 사람이다. 1905년 11월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을사륵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주권을 크게 제약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우리 민족은 전국 각처에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한편 일진회원 등 친일파 처단을 목표로 대대적인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황봉신 역시 이같은 시기에 항일 무장투쟁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이룩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이진룡(李鎭龍) 의진에 가입하여 평산에서 활동하였다. 이진룡은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으로 을사륵약이 체결되자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수많은 전투를 전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그는 국내에서 의병운동을 더 이상 전개할 수 없음을 알고 만주로 망명하여 홍범도(洪範圖) 등과 함께 군사양성에 주력하던 인물이다. 황봉신 또한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기약하면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주하였다. 특히 그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16년 음력 9월 9일 조맹선(趙孟善)·이진룡·황봉운(黃鳳雲)·김원섭(金元燮)·김효선(金孝善)·한치현(韓致賢) 등과 함께 평북 운산군(雲山郡)의 미국인 금광으로 향해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평북 영변군(寧邊郡) 팔원면(八元面) 용성동(龍城洞) 말씹고개 밀림에 매복하여 운산금광(雲山金鑛)의 운송마차를 공격하여 군자금을 조달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그는 다시 남북 만주(滿洲)에서 활동하던 중, 이진룡이 일본군에게 붙잡히자 여순(旅順)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탈환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황봉운과 더불어 붙잡혀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17년 12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고, 1918년 5월 1일 이진룡·황봉운과 함께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5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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