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熙
(1893) ~ (1923-07)·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황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북 경원(慶源) 사람이다. 1919년 12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에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가 조직되자, 창립 초부터 가입하여 군기운반대장(軍器運搬隊長)으로 활동하였으며, 1920년 10월 이후 수개월간 일본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이 과정에서 득병(得病)하였음에도 오히려 경비대장(警備隊長)으로 지방치안을 위해 힘쓰며 노령(露領)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1923년 7월 사망 순국하였다. 대한군정서는 1919년 12월 중국 길림성 왕청현(汪淸縣)에서 대종교(大倧敎)를 중심으로 조직된 무장독립군 부대로서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장 이장녕(李章寧),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여단장 최해(崔海),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등이 주요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군정서는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도움을 받아 청년들에게 6개월간에 걸쳐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인근 독립운동단체와 제휴해 북만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20년 10월, 대한군정서는 이른바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군 혼성부대인 동지대(東支隊) 37여단 소속 1만 명과 접전하여 4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 일본군의 반격을 피해 소만(蘇滿) 국경으로 이동해 10여 개 독립군 부대와 통합하여 연해주(沿海州)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해 1922년 소련에 의해 무장해제 당할 때까지 독립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한 단체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3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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